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펑 유대인 (문단 편집) == 역사학계의 연구 == 비판적으로 고증해보자면 카이펑 유대 회당 비문에 나온 내용은 신뢰성이 낮은 편이다. 해당 비문에는 [[기원전 108년]], [[전한]] [[한무제|무제]] 때 국경을 넓히기 위해 [[간쑤성]]에서 파견된 [[페르가나]] 일대로 파견된 이광리 장군과 그의 군사들에게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지만,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로는 이란 동부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규모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정착한 시점은 서기 4세기 무렵이다.[* 이광리가 서역에 파견나간 시점은 기원전 104~102년이다.] 유대인들이 [[악비]]의 휘하에 들어가 [[금나라|금]]군과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. 또한 이 유대인들은 카이펑이 금에게 함락될 때 조구(남송의 [[송고종]])를 수행해 임안(항저우)까지 내려가 임안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. 비교하자면 [[청해 이씨]]가 자신들을 [[악비]]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. 중국 사학계의 최신 학설에 따르면 이들은 [[송나라]]가 아닌 [[원나라]]가 서역에서 [[색목인]]들을 데려오면서 같이 중국에 들어온 [[페르시아 유대인]]들의 후손이라고 한다. 이후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명나라가 색목인들을 원나라가 들여온 이방인 취급하면서 탄압하고 강제 동화정책을 펴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원나라가 데려온 이방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온 연대를 [[송나라]]에서 [[한나라]] 시대까지 앞당기는 기록들을 만들어놓았다는 것. 물론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[[당나라]] 시기 이후로 [[실크로드]]를 통해 [[중앙아시아]] 및 [[중동]]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, 원나라 이전에도 중국 땅에 유대계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된 바는 있었을 것이다[* [[유대인]]은 아니지만, [[당나라]] 시기에 서방의 [[네스토리우스파]] [[기독교|기독교인]]들이 [[페르시아]] 내 [[조로아스터교]] 신자들과 [[무슬림]]들의 박해로 인해, [[중앙아시아]] 및 [[중국]], [[몽골]] 초원으로 대거 유입이 되었던 적은 있다.]. 하지만, 그 이전까지는 일시적인 방문이나 극소수 인원의 정착만 있었을 것이며,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으로 분류될 만큼 대규모로 이주한 건 훨씬 이후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. 실제로 [[원나라]] 시기는 [[동북아시아]]에 [[중동]]계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된 시대이기도 했다. [[카이펑시|카이펑]] [[유대인]]의 조상인 [[페르시아계 유대인]] 이외에 [[아랍인|아랍계]], [[이란인|페르시아계]], [[튀르크]]계 [[무슬림]]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, 이들은 원명 교체 시기를 거쳐 [[한족]]에 동화된 뒤에 오늘날의 [[후이족]]의 조상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